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페르디난트 (문단 편집) === 사상과 업적 === 그는 당시 사람치고는 드물게 고집이 세고 자기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현대 2020년대 기준으로도 프란츠 페르디난트 같은 경우는 일반 시민이라면 모를까 왕족은 물론 정치인 중에서도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 자체가 자기주관과 고집이 센 이런 경향이 전통적으로 있어왔고 그래서 세계사적으로도 독특한 왕실 및 귀족 가문의 케이스로 꼽히긴 하는데 그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조차도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특이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본래 황위계승과는 먼 사람이었다 후계자가 된 자라 그런 모양. 황태자는 기존 권력층인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정계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페르디난트가 꾸린 예비 내각만 보더라도 기성 정치권에서 소외된 슬라브계 민족,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이 많았다. 뒤집어 말하면 출신성분과 민족을 따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화 유지에 대한 강력한 소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둘 다 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에 대한 적대정책에 반대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 모든 것이 페르디난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불평등한 국가 구조의 혁신에 대한 정치적 신념, 귀천상혼 같은 개념은 버리고 연애결혼을 하는 등 여러모로 진보적인 인물이었고, 오스트리아 정계의 멸시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슬라브계 등용을 통한 오스트리아 제국 통합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파일:Greater_austria_ethnic (1).svg|width=750]] ▲ 페르디난트가 지지했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에 따라 작성된 제국 지도. 민족별로 제국을 재편했다. 페르디난트는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사상적 차이로 자주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6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을 제창하여[* 이 방안을 제안한 아우렐 포포비치는 [[루마니아인]]이었다.] 민족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일생일대의 업적인 [[대타협]]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대타협 체제를 근본부터 뒤집는 페르디난트의 안건을 거부했다. 또한 이렇게 되면 기존 체제에서 권익을 가졌던 독일계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이 불리했기 때문에[* 두 민족을 합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전 인구 비율에서 고작 44%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44%도 유대인들을 포함한 수치였다.] 기존 권력자들, 특히 제국의 절반을 차지하며 자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 동화 정책을 펴던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 왕국]] 정계와의 반목도 극심했다. 헝가리 총리 [[티서 이슈트반]]은 대놓고 페르디난트가 즉위해 개혁을 밀어붙인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의 방안대로라면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슬로바키아]], [[보이보디나]], 그리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를 잃어버리고 영토가 3분의 1로 쪼그라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위협은 단순한 허언이 아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동군연합|두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체제로]],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한 자격에서 제국을 절반씩 나눠 다스렸다. 헝가리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역, 일명 [[성 이슈트반 왕관령]]에 대한 자체적인 내정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데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s-6.1.4|자체적인 군대]]까지 보유했다.[* 명목상 황제가 지휘하는 정규군 조직인 '합동 육군' 외에도 [[미국]]의 [[주방위군]]처럼 독자적인 예비군 조직인 '방위군'([[국가협의회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오스트리아 제국]]은 황립 및 왕립 란트베어,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 왕국]]은 왕립 혼베드)을 유지하고 이는 각각 오스트리아 총리, 헝가리 총리의 지휘를 받았다.] 이 때문에 헝가리 총리가 황실 후계자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합동 육군과 란트베어, 그리고 황립 해군은 헝가리 혼베드의 반란 상황에 대비한 작계까지 세워 두었을 정도다. 헝가리가 그렇게 뻗댄다면 군대로 밀어버리거나 해서 강제로라도 고분고분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랬다가는 동군연합의 특성상 제국이 더 빨리 해체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아이디어는 제국 멸망 이후에야 반영되며, 전쟁에서 이긴 협상국은 오헝 제국을 해체하고 그 영토를 타국에 할양할 때 그의 합중국 방안에 따라 작성된 지도를 일부 참고했다. 군사적으로도 페르디난트는 자국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를 현대적으로 개선하고자 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육군 [[병과대장|대장]]으로서 제국군 [[감찰관]](Generalinspektor der gesamten bewaffneten Macht)이 된 페르디난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황제]]의 신임을 받는 인물로서 자그마치 25년간 육군참모총장직을 역임하며 제국의 부제(Vizekaiser)라고까지 불리던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백작[* 벡지코프스키는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동갑인 1830년생으로, 해임 당시 나이가 자그마치 76세였다.]을 해임하고, 대신에 자기가 눈여겨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대장을 후임 참모총장으로 정하였다. 회첸도르프가 페르디난트 자신이 구상한 군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군 내부에 페르디난트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구축하고자 한 목적도 있었다. 다만 평화주의적이었던 페르디난트와 달리 지나치게 호전적이었던 회첸도르프와 갈등이 불거지면서, 회첸도르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한다. 동시에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황립 및 왕립 해군]]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육군 대장임과 동시에 해군의 [[대장(계급)|대장]]이기도 했다. 20세기 초의 유럽은 건함 경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페르디난트는 전함 12척, 장갑 순양함 4척, 정찰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대형 어뢰정 36척, 잠수함 6척 등이 포함된 대규모의 건함 계획을 지지했다. 실제로 그의 구상에 따라 건조된 것이 바로 제국 해군의 주력함인 [[테게토프급 전함]]이다.[* 그와 부인이 사망한 후 그들의 유해는 [[테게토프급 전함]] 1번함인 비리부스 우니티스(Viribus Unitis)로 오헝 제국 본국에 운구되었다.] 그의 개혁 정책은 1차 대전에서 제국군이 부족하게나마 [[협상국]] 군대와 맞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던 페르디난트를 두고 말이 많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실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당시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개혁 성향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다. 세르비아는 이미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이라는 이름의 독립국이었지만, 대세르비아주의자들은 세르비아인들, 그리고 더 나아가 형제 민족인 [[보슈냐크인]]들과 [[크로아티아인]] 같은 남슬라브인들이 사는 보스니아 등도 세르비아령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많은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를 모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세르비아 왕국으로 묶여서 독립당하느니 차라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 있기를 바랐고, 이 때문에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황태자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세르비아인들을 공격했다. 그나마 세르비아에 대해 온건한 편이던 슬로베니아인들조차 세르비아의 남슬라브 통합정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불씨는 이미 이 때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의 개혁이 성공하면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남슬라브인([[유고슬라비아]])들도 독일계, 헝가리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어 굳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었다. 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결코 좋지 않은 미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로서 제국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재편성 계획을 내놓은 것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세르비아의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황태자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